[여행의 향기] 사라예보, 유럽의 거리에서 모스크를 만나다

입력 2016-08-15 16:00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여행

"탕!"…1차 세계대전 '신호탄' 울린 라틴 다리

시청 옆 올드타운 들어서면 이슬람식 카페·상점들이 빼곡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유산

걷다보면 주변 풍경 달라져
모스크 대신 유럽풍 석조건물…4개 종교 문화가 한 곳에 공존

내전의 아픔 고스란히…길바닥 곳곳 포탄 흔적 "사라예보의 장미라오"

1990년대 사라예보 포위전으로 1만여명 민간인 목숨 잃어
탈출용 터널엔 전쟁의 상흔 생생
'노란 요새' 주타 타비야 오르니 석양 속 사라예보 전경 한눈에



[ 사라예보=고아라 기자 ]
험준한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따라 반나절을 꼬박 달렸다. 이윽고 안개 자욱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수도 사라예보다. 해발 약 537m, 트레베비치 산에 둘러싸인 사라예보의 모습은 마치 비밀스러운 요새 같다. 도시는 키 작은 집들과 뾰족한 지붕으로 가득하고 좁게 흐르는 강 옆으로는 낡은 노면전차가 도시를 순환한다. 이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부르기만 해도 가슴 아픈 이름이 될 줄은.

사라예보의 총성, 비극의 신호탄이 되다

사라예보의 아침 밀야츠카 강변을 따라 걷었다. 강 위로 늘어선 다리를 하나둘 지나다 보니 어느새 그 유명한 라틴 다리 앞에 와 있다. 대부분의 발칸반도 국가가 그렇듯, 보스니아 또한 고대에는 로마, 근세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19세기 말, 보스니아는 이중 제국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이중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시청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오전 10시 라틴 다리 앞을 돌던 그때,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저항하는 비밀결사단 소속 19세 세르비아 청년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다.

그가 쏜 총알이 사라예보는 물론 유럽을 넘어 인류 전체를 비극의 소용돌이로 내몰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다리를 건너는 동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엉켜 섞인다. 암살이 벌어진 현장 앞 건물은 현재 사라예보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벽면은 당시 사건을 보여주는 사진과 회화들로 가득하다. 강변을 따라 좀 더 걸으니 무어 양식으로 지은 노란 빛깔의 건물이 보인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당하?전 마지막으로 들른 시청사 건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국립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건물이 불에 타고 90%에 달하는 서적과 자료가 소실됐지만, 현재는 재건됐다. 말끔한 건물 앞으로 총탄 자국 가득한 트램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유럽에서 느끼는 이슬람의 정취

시청사 옆 골목을 따라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올드타운이 펼쳐진다. 일대의 이름은 바슈카르지아, 터키어로 중앙광장이란 의미다. 거리 대부분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형성됐다. 반들반들한 자갈과 대리석이 깔린 거리를 따라 걷는다. 주황 기와를 얹은 터키 전통가옥 사이로 모스크의 미나렛이 솟아올랐다. 거리는 카페와 상점, 호텔로 빼곡하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터키식 테이블과 방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연기를 뻐끔거리며 나르길레를 피운다.

올드타운은 시간을 두고 골목골목을 여유롭게 살펴보는 것이 좋다. 골목 구석구석에 진귀한 오스만제국의 유산이 포진해 있다. 바슈카르지아 중앙에는 세빌리 샘이 있다. 조촐하지만 올드타운의 상징이자 만남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곳의 샘물을 먹으면 사라예보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메인 거리인 사라치 거리로 내려오니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사원으로 여겨지는 가지 후스레브 베그 모스크, 시계탑, 상인들의 여관이던 타슬리한, 오스만제국 전통시장인 베지스탄 등의 유적이 있다. 방향을 틀어 카잔드지룩 거리에 들어선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 하나다. ‘장인의 거리’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구리, 주석, 은 등으로 만든 온갖 수공예품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치 오스만제국의 어느 골목으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공존과 대립을 넘나드는 거리

이슬람 정취에 흠뻑 빠져 걷는데 별안간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낮은 지붕의 터키식 가옥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풍의 석조 건물로 바뀌고, 첨탑 대신 십자가가 걸려 있다. 거리에 앉아 구리로 만든 잔에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체스를 두며 시간을 때운다. 바닥을 보니 ‘문화가 만나는 곳’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페르하디야 거리와 사라치 거리가 만나는 이 지점은 여러 문화가 섞인 사라예보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다. 발 한 걸음에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수백년의 역사를 껑충 뛰어넘는다.

보스니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다. 6~7세기 슬라브인들이 정착한 이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민족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왔다. 종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가 주였지만, 400년이 넘는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이슬람교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1429년 레콘키스타 이후에는 추방당한 유대인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 사라예보가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4개의 종교가 한 도시에 공존하는 곳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사라예보가 유일하다.

1992년 보스니?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이들은 서로 보듬으며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그러던 그들이 별안간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이 되어버린 셈이다.

카페에 앉아 거리를 바라본다. 동쪽의 모스크에서는 아잔이 들려오고, 서쪽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칼로 벤 듯 나뉜 거리 위로 히잡을 쓴 회교도 여인, 교회로 향하는 신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걷는다. 오랫동안 함께 걷던 이들이 왜 피를 흘려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800m 터널, 도시의 생명줄이 되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수장인 티토 사망 이후 발칸반도는 혼돈에 휩싸였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이어 보스니아 또한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를 원치 않던 세르비아계가 반발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사라예보를 봉쇄한 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무자비한 포격과 학살을 자행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사라예보 포위전의 결과 1만3000명에 달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5만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군수물자는 물론 식량, 물 등 모든 보급로가 끊긴 사라예보에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때 보스니아군과 시민들은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사라예보부터 공항 뒤편 자유 보스니아 진영이 있는 곳까지 활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약 4개월간의 사투 끝에 1993년 7월30일, 드디어 사라예보의 터널이 완성됐다.

가이드와 터널 박물관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마르코, 사라예보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다. 터널로 가는 길은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스나이퍼 앨리라 불리는 ‘보스니아 용’ 대로에 잠시 멈춰 섰다. 사라예보 포위전이 스브레차 대학살과 함께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된 이유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높은 빌딩이나 산에 숨어 이 대로를 건너는 시민을 조준 사살했다. 무자비한 사냥의 결과 1030명이 부상하고, 225명이 사망했다. 그중 60명은 어린아이였다.

담배 경고문조차 세 가지 언어로 씌어

무거운 마음으로 터널 박물관에 도착했다. 소박한 2층짜리 건물에 총알 자국이 가득하다. 길바닥에 새겨진 빨간 자국이 눈에 띈다. 사라예보 시내에서도 자주 본 것들이다. 마르코에게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사라예보의 장미’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대답했다. 내전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시 포탄이 떨어진 자리를 빨갛게 칠해둔 것이라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사라예보에 있는 내내 몇 개의 장미를 보았는지 기억하려 애쓰다 이내 그만둔다. 피지 말았어야 할 슬픈 장미들이므로.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선다. 1층은 박물관으로 터널을 만들 때 사용한 각종 도구와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지하로 내려가자 허리를 한껏 구부려야 할 만큼 낮고 좁은 터널이 나타난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약 20m. 이 터널로 매일 30t 이상의 물품을 조달했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한 몸 가누기도 버거운 이 통로가 수백만 사라예보 시민의 생명줄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별관에는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좋았던 물자는 식량이 아니라 담배였다는 인터뷰 내용이다. 음식이야 먹어치우면 끝이지만 담배 한 개비는 배고픔을 잊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죽음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던 암흑의 시절, 담배 끝에 붙여진 빨간불은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을 것이다. 영상이 끝나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마르코가 갑자기 담뱃갑을 보여준다. 손바닥 반만 한 공간에 경고문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로 세 번이나 써져 있다. 말문을 잃은 내게 그는 한마디 던졌다. “담배경고문조차 세 가지 언어로 나눠 써야 하는 것. 이것이 사라예보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도시

터널에서 돌아와 노란 요새, 주타 타비야로 향했다. 가장 쉬운 길은 올드타운의 코바치 거리에서 국립묘지를 지나 오르는 것이다. 마을 뒷산 어디에서나 길은 이어진다. 허름한 집들이 비탈길 골목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좁은 마당에는 땔감이 쌓여 있고, 마당에는 빨래가 걸려 있다. 아이들은 계단에 걸터앉아 순박한 웃음을 건넨다. 우리네 시골 마을 같은 풍경에 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담벼락의 총탄 자국이 눈에 밟힌다.

요새에 도착하자 사라예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붉은 집들 사이로 첨탑과 십자가와 둥근 돔 지붕이 어지럽게 섞여 있고, 그 사이를 밀야츠카 강이 관통한다. 도시를 둘러싼 산 곳곳에는 공동묘지가 숲을 이뤘다. 하얀 것은 무슬림의 무덤이고, 검은 것은 기독교인들의 무덤이다. 철저하게 구획이 나뉘어 있지만, 대부분 묘비에 적힌 사망연도는 1992년에서 1995년 사이로 비슷하다. 전쟁이 끝난 지 약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현재 보스니아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가 차지한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아슬하게 나뉘어 있다. 사라예보는 언제나 안개가 가득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도시와 닮은 풍경이다. 석양이 진다. 비통한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일은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찾아오길 간절하게 바라본다.

사라예보=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여행정보

사라예보로 가는 직항은 없다. 터키나 오스트리아, 체코 같은 국가를 경유해서 가야 한다. 발칸반도에서는 주요 도시를 잇는 버스나 미니밴을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는 보스니아 마르크(BAM)다. 1보스니아 마르크는 한화로 약 675원이다. 달러나 유로를 가져가 환전하거나 자동입출금기(ATM)에서 인출할 수 있다. 환전은 은행보다는 사설환전소가 조금 더 유리하다. 언어는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를 공용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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